김무성 친일파 논란 대권후보에 대한 야권 견제인가?
정치권과 친일파 논란 무엇이 진실인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대권후보자로 5주 연속 지지율1위를 기록하며 여권 대권 후보로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김무성대표의 부친에 대한 친일 의혹이 야권에서 솔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먼저 포문을 열기 시작한것은 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위원의 페이스북이였다. 정청래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언론사주를 겨냥해 친일행적에 대한 비난의 글을 게재했다. 정 의원의 게시글은 ‘친일 논란’을 일으키며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가며 온라인상에서는 뜬금없이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부친의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김무성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은 이미 야당에서 한번 제기한적이 있었으나 동명이인으로 사과를 하고 마무리 된적이 있었다.
김무성 대표 부친에 대한 친일 의혹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촉발됐다. 지난 2013년 7월 30일 유 전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대화록의 진실2-김무성, 박근혜, 그리고 법치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을 올렸다.
유 전 장관은 해당 글에서 “김무성 의원(당시)의 아버지 김용주는 일제강점기 경북도회 의원이었으며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였다. 전쟁에 나간 ‘황군(일본군)’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펼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소위 ‘적산(敵産)’ 전남방직을 불하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기술하면서 김무성 대표 부친에 대한 친일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 대표측은 유시민 전 장관이 친일 행적을 근거로 제시한 대목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먼저 일제강점기 시절 경북도회 의원을 지낸 것에 대해 “도의원을 지냈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당시 도의원은 관선도 아니고 주민들의 손으로 뽑은 민선이었으며 또한 도의원이 당시 조선총독부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적인 부분에 대해 질의하고 요구를 했던 자료가 남아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김무성 의원의 부친은 자신의 자산을 털어서 조선인 학교를 설립하고 도의회에서 조선인 선생을 더 채용하자고 주장했으며 조선인들이 학교를 못가니까 사립학교 허가를 빨리 내달라고 요청한 속기록도 남아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런 것을 살펴보지 않고 도의원을 했다는 것만으로 친일이라고 하는 것은 명예훼손적 요소가 있다”고 강조했다.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간부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임전보국단은 전시 상황에서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민족지도자까지 가입시킨 곳으로 3·1운동을 했던 한용운, 오세창, 권동진, 정춘수 등 민족지도자들의 이름도 올라가 있었다”면서 “이는 일본에서 강제로 이름을 넣은 것인데 김 의원 부친의 가입 근거도 없지만, 가입 사실만으로 친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전남방직’과 관련해서는 “김 의원의 부친이 전남방직을 맡은 게 1956년인데 그것을 인수 받은 과정도 자료를 살펴봐야 한다”며 “광복 이후에 기업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라고 단정 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근거로 당시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김무성 의원 아버지 김용주(창씨개명 金田龍周)는 일제강점기 경북지역을 대표하는 친일파”라고 규정하면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밀리던 1941년 ‘황군(일본군)에게 위문전보를 보내기’를 주도한 전력 등 친일 행적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상태에서 독재 권력에 빌붙어 주일공사도 맡았고 방직회사와 해운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자로 호의호식을 누리며 경총 초대회장을 지냈다”고 주장하며 1941년 매일신보에 보도된 기사를 증거로 제시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가 증거로 제시한 1941년 매일신보 기사
그러나 민주노총이 제시한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당시 유력인사들의 이름을 함부로 쓰거나 당사자가 작성하지 않은 기고문이 임의로 작성돼 기사 자체의 왜곡과 날조가 빈번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은 10월 11일 브리핑에서 급기야 김 대표의 부친이 ‘친일 인명사전에 대표적인 친일파로 등재됐다’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논평까지 했다.
배 대변인은 ‘매국 부패 세력의 득세, 어느 국민이 애국하고 청렴하게 살겠는가’라는 주제로 한 브리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을 비롯해 전두환, 김영삼, 이명박 정권 등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A급 전범, 독도 망언 정치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정치인 등 일본 정치인 12명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청소년들에게 역사 제대로 가르치겠다더니 친일-독재찬양 교과서 논란에 불을 붙이고 기름까지 쏟아 부었다”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대표적 친일파로 등재된 김용주의 아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대놓고 역사 전쟁의 선봉장을 자처하고 있다”고 언급해 김무성 대표를 친일파의 아들로 몰아 세웠다.
하지만 배 대변인의 논평은 곧바로 문제점을 드러냈다. 배 대변인이 논평을 한 이틀 뒤인 13일 “지난 11일 현안 브리핑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의 부친인 전 주일공사 김용주 씨와 관련해 ‘친일 인명사전에 대표적인 친일파로 등재’됐다고 논평한 바 있다”며 현안 브리핑에서 이 문제를 다시 되짚었다.
배 대변인은 이어 “그러나 김용주 씨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에 사실관계를 바로 잡고 항의 의사를 전달해 온 김무성 의원에게도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밝히면서 배 대변인은 머리를 숙였다.
김 대표 부친의 친일 의혹 제기는 유 전 장관이 처음이 아니었다. 유 전 장관이 친일 의혹을 제기하기에 앞서 한 달여 전 <한겨례> 김의겸 논설의원은 유 전 장관이 의혹 제기한 내용을 한겨례 사설을 통해 먼저 언급했다.
결국 지난 2013년 10월 한겨례는 김 논설위원의 사설과 관련해 <김무성 의원 부친 관련 반론 및 정정보도>를 냈다.
한겨례는 정정보도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의 부친(김용주 전 대한해운공사 사장)이 친일행적을 보였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 의원은 ‘당시 경북도회 의원들은 조선인 농민들의 편에 서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하였으며 김 의원의 부친은 사재를 털어 조선인 한글교육 야학을 개설하고 일본자본에 맞서 조선상인회를 설립하는 등 애국자적 삶을 살았고, 친일인명사전에도 없으므로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밝혀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편, 칼럼 가운데 ‘김 의원이 빨갱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내용은 확인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럼 김무성 대표의 부친인 해촌 김용주에 대하여 알아보자.
1936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포항지역 포항예수교 장로회에서 임시적인 형태로 영흥학교를 운영해 왔는데 일제의 신사참배, 일장기 계양 등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경영난을 겪자 영흥학교는 존폐위기에 처했다.
동아일보(1936.2.28) - 비운의 영흥교 갱생의 서광
"포항 영흥학교 … 유지 곤란이 극도에 다하여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 포항의 청년실업가 김용주씨가 자진하여 앞으로 학교의 경영을 책임을 지기로 하고 우선 1천수백원을 내어 교사를 증축하기로 하여 수운에 싸여있던 동교는 기쁨의 성광이 비추었다…"
이를 지켜본 해촌 선생은 자신의 재산 절반 이상을 털어 교명과 학생들을 인수받아 사실상 영흥학교를 새로이 신설했다.
그러면서 환경적 제약으로 비교적 배움과 거리가 있는 여성들을 모아 부인야학을 개설해 한글을 가르쳤다. 여기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해촌 선생이 부담했는데 당시 해촌 선생의 이런 행보가 지역민들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1940년 1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해촌 선생은 학교와 운동장 등이 협소하고 기타 불편한 점을 해결할 목적으로 2만원을 사재 출연해 영흥학교를 시내중앙에 이전 토록하면서 새로 신축했다.
동아일보(1940.1.7) - 사재 2만원 던져 사립영흥교를 신축
"경북 포항읍 김용주씨의 미거(美擧). 신춘벽두의 쾌소식 … 자기 사재 2만원을 무산아동교육사업에 하사한 동지가 한 분 있으니 그 분은 곧 경북도회 의원으로 지방에서 각 요직을 가지고 내외를 통한 독특한 활약을 하는 포항 김용주씨인데, 금년 40고개에 있는 대사업가로 동해안 일대에서 유일무이한 웅변가로 이미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알려져 있는데, 금번 포항영흥학교에 거대한 금액을 회사케됨은 본시 동교가 포항장로교회 경영으로 삼십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무산(無産), 아동을 교육시켜 오던 중 사정상 수년전에 김씨와 지방유지들이 인계하여 경영 중, 매년 천여원 이상 부족경비를 동씨(김용주)가 자담하여 금일까지 지장 없이 지내오던 바, 교사가 협착하고 시내중앙지에 교사가 있게 되어 운동장 등 기타 불편한 점을 영구해결할 목적으로 김용주씨는 신녀벽두 첫 사업을 영흥학교에 두고 2만여원이란 거액을 던져 교사를 이전 신축토록 하였다. 이 신년의 쾌보에 일반은 크게 칭송하는 동시에 그 학교의 장래를 더욱 촉망하였다 한다."
같은 해 4월에는 포항지역에 학교가 부족한 것을 고려해 포항지역 초등교육기관 확충기성회를 조직해 포항 지역 학교 확충에 기여하였다.
동아일보(1940.4.14) - 입학난에 우는 포항 아동, 초등교 확충이 긴급
"…인구 3만을 헤아리는 이 땅에 영일소학교 23학급 외에 사립영흥학교 6학급에 불과하다. 금년도 영일소학교 신입아동 지원자수는 750여명이었으나, 수용정원은 불과 280명 밖에 되지 않았으니, 선발고사에 합격한 아동과 학부형들은 환희와 기쁨을 가졌으나 낙선된 470여명의 아동과 학부형들의 실망과 낙담이야 말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구제책을 숙제도 두었던 읍민들은 4월 10일 오후 1시에 포항읍 초등교육기관 확충기성회를 조직하고 … 당선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김두하, 부회장 김용주…"
이에 앞서 1938년 해촌 선생은 조선총독부의 지나친 교육 간섭과 규제로 몇 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사학이 말살되고 기본적 인권이 침해됨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당국에 일본인 교원이 아닌 한국인 교원 채용 충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관심과 노력 때문에 일각에서는 해촌 선생을 ‘교육의원’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해촌 선생은 경북도회의원 시절 일본상인에 밀리는 조선상인들을 위해 ‘조선상인회’를 설립했다.
해촌 선생이 도회의원 활동 당시 포항지역 조선인 80%는 자본금 100원에서 2000원 정도의 소상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일본인 상인들에 비해 자본금 규모 등 여타 조건이 턱 없이 미비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일본인 상인과 조선인 상인간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해촌 선생은 포항지역 조선인 상인들을 위해 조선상인회(포항상공번영회)를 설립했다.
동아일보(1925.5.9) - 포항 노동야학 거일일부터 개최
"경북포항영일청년회 주최로 5월 1일부터 노동야학을 개하고, 무료교수를 하는데 학생 60여명이 집합…선생은 포항유지 10여명이 무보수명예직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바…선생명단 : 김용주, 이재우, 이종철 …"
1925년에는 포항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이듬해인 1926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돼 구금되었다.
해촌 선생은 이 일로 인해 은행을 그만두게 되면서 1926년 10월 포항에서 철도운송으로 수산물을 위탁판매 하는 '삼일상회'를 세웠다. 삼일상회는 국내 주요 도시 곳곳에 거래처가 즐비했으며 해촌 선생은 거래처로부터 사업 수완을 인정받아 사업이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삼일(三一)’이라는 상호가 반시국적이고 불온하기 때문에 상호를 변경하지 않으면 구속시키겠다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다가 결국 삼일상회를 세운지 18년 만인 1944년 강압적으로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매일경제(1984.2.26) - 근세 100년, 산업과 인물
"김용주는 경남 함양 출신으로 부산공립상업학교를 1923년 졸업하면서 … 1926년 나이 23세로 독립하여 삼일상회(三一商會)를 설립하고 …그런데 1943년에 가서 왜경의 강요로 삼일상회 간판을 내려야 했다. 삼일(三一)이란 명칭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촌 선생은 일본인들에게 해운산업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선해운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우리나라 해운의 자주건설과 발전을 도모하였다.
1946년 6월 15일 이와 같은 내용이 기사에 실렸는데 “삼면이 바다인 조선을 해양국으로 건설하려는 원대한 설계아래 조선해운대책위원회가 14일 시내 종로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결성준비위원회 대표 김용주씨를 비롯하여 해운관계자 다수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시작하고…(중략)이 위원회는 조선 해운의 자주건설과 급속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생략)”이라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동아일보(1937.10.12) - 조선(朝鮮) 해운발전대책위원회 결성하여 활동
"…삼면 바다인 조선을 해양국으로 건설하려는 원대한 설계아래 조선해운대책위원회가 14일 시내 종로기독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결성준비위원회 대표 김용주씨를 비롯하여 해운관계자 다수 참석한 가운데 결성식을 시작하고…이 위원회는 조선 해운의 자주건설과 급속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으로…강령은 다음과 같다. [강령 : 우리는 해운건설 제반대책을 강구하여 조선 해운의 자주건설과 급속적 발전을 기함]"
아울러 1949년 8월 1일 경향신문은 해방 무렵 일본이 한국어선 82척을 끌고 가 반환하지 않자 정부가 해당 어선 반환 교섭을 위해 조선해운 발전에 힘쓰던 해촌 선생을 미국에 파견시킨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해촌 선생의 애국자적 면모를 보인 일화는 또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인천상륙작전계획이 워싱턴의 승인을 받은 다음날인 9월 10일. 당시 주일공사였던 해촌 선생은 맥아더 장군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 인천상륙작전 관계자들이 동석한 가운데 해촌 선생은 5대 궁궐과 4대문 등을 하나하나 지도에 표시해가며 우리 역사유물과 주요문화재들을 보호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맥아더 측은 난색을 표하면서도 해촌 선생의 나라를 위한 마음에 감동해 인천상륙작전에 있어 서울에 대한 폭격이 진행되는 동안 덕수궁 일대와 종로 거리는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켜 소중한 문화재를 지킬 수 있었다.
해당 내용은 1975년 5월 16일자 경향신문에 실렸으며 ‘EBS 역사채널e’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